목석거(木石居)


청음선생목석거유허비(淸陰先生木石居遺墟碑)는 조선 중기의 대 선생이요 절의(節義)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선생이 살았던 옛터를 기념하여 그의 7대손인 화서(華棲) 김학순(金學淳, 1767~1845)이 세운 기념비이다. 비문은 지촌(芝村) 이희조(李喜朝, 1655~1724)가 지었다.
이희조는 연안(延安) 이씨(李氏)의 현조(顯祖)인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의 손자요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의 아들이다. 그는 또한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문인(門人)으로 만년에는 조정에서 유현(儒賢)으로 대우했다.
그는 이 비문을 지으면서 자신의 당질(堂姪)인 송벽당(松蘗堂) 이정신(李正臣, 1660~1727)이 청음 선생이 83세로 세상을 떠난 58년 뒤 안동부사로 부임해 유허를 둘러볼 때 무성한 잡초를 부여잡으며 탄식하기를, “선생은 우리 동방의 백이와 같은 분이시기 때문에 이곳 학가산은 선생에 있어서는 수양산이다. 그런데도 어찌 선생께서 고사리를 캐셨던 유적이 이처럼 민몰(泯沒, 자취가 아주 없어짐)되게 할 수 있겠는가(先生 我東之伯夷 而鶴駕 是先生之首陽 豈可使採薇遺跡 泯沒如此耶)”라 하고는 작은 비를 세운 뒤 그 전면에다 ‘청음선생목석거유허비(淸陰金先生木石居遺墟碑)’라고 하고서 내게 비문을 부탁했다고 밝히고 있다.
청음 김상헌 선생은 좌의정을 지낸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의 외손(外孫)이다.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世子傅)를 지냈다. 청축(丁丑) 척화신(斥和臣)으로 이름났다.
그는 21세 때 진사시에 합격한 뒤 27세 때 정시(庭試) 문과에 급제했고 39세 때 중시(重試)에 합격했다. 67세 때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국왕을 호종(扈從)해 고수(固守)의 계책(計策)을 주장했다.
68세 1월에 묘당(廟堂)에서 항복의 뜻을 적은 국서(國書)를 찢고 척화(斥和)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6일간을 단식(斷食)하며 자결(自決)까지 시도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안동(安東) 풍산(豐山)으로 내려가 학가산(鶴駕山) 아래 서미동(西美洞)으로 들어가 ‘목석(木石)’이라는 현판을 걸고 은거(隱居)했다. 71세 때 청(淸)나라 심양(瀋陽)으로 압송(押送)되었고 그곳에서 부인의 상을 당했다. 이듬에 병이 들자 의주(義州)로 보내졌다. 74세 때 다시 심양으로 피체(被逮)되었다가 76세 때 세자(世子)와 함께 돌아와 석실(石室)에 은거(隱居)했다.
77세 때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32차례나 상소해 끝내 벼슬에서 물러났다. 80세 때 효종(孝宗)이 즉위하자 다시 좌의정으로 기용되었다. 83세를 일기로 양주(楊州) 석실에서 세상을 떠났다.
비 전면에는 김학순이 쓴 ‘목석거(木石居)’라는 대자 글씨와 ‘경진(庚辰) 중춘(仲春) 선생(先生) 칠대손(七代孫) 본부사(本府使) 학순(學淳) 근서(謹書)’라는 찬자의 표지가 있다. 그리고 그 아래 ‘만석유허(萬石遺墟)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선생에 대한 기림을 새겨두었다. 만석유허는 청음이 이곳에 은거할 당시 공간을 ‘만석산방(萬石山房)’이라고 이름했기 때문에 붙인 것이다.
김학순은 이 비를 수립함과 아울러 청음이 은거했던 안동 풍산 서미동 입구에 있던 거대한 자연석을 ‘은자암(隱者巖)’이라고 이름 짓고 그 아래다 ‘해동수양(海東首陽), 산남율리(山南栗里)’라고 대서특필(大書特筆)해 새겼다. 이는 청음 선생이 지향했던 정신이 저 중국의 백이숙제(伯夷叔齊)나 도연명(陶淵明)과 그 궤(軌)를 같이한다는 후손(後孫) 또는 후학(後學)으로서의 무한한 기림이었다.
암각서(巖刻書) 아래에 ‘경진춘(庚辰春, 1820) 부사(府使) 김학순(金學淳) 서(書)’라고 이 일을 주도한 자신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이는 안동부사로 재임 중인 김학순이 이 글씨를 썼다는 의미다.
김학순은 영남의 이름난 누각일 뿐 아니라 안동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누각인 영호루(映湖樓) 누마루를 가로질러 걸린 ‘초대형 현판’을 쓴 주인공이기도하다. 현판 문구는 영호루에 걸맞는 영호루에는 순조20년(1820)에 안동도호부사(安東都護府使) 김학순이 쓴 ‘낙동상류 영좌명루(洛東上流嶺左名樓)’이다. 이 현판은 관각 인사의 방달불기(放達不羈)한 법필(法筆)로 쓰여져 보는 이들을 경탄하게 만든다. 이곳은 역대 국왕이나 조정에서도 기림의 대상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10년(1786) 기록은 이러하다.

정조10년 병오(1786) 2월 22일(병신) 김상헌의 사당에 편액을 하사하고 치제하다.
영남 유생 김제묵(金濟默) 등이 상소하여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안동(安東) 목석거유허사(木石居遺墟祠)를 서원(書院)으로 승격하고 편액을 하사해 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선정(先正)의 관향(貫鄕)이 안동부(安東府)이고 이 지역에 물러가 살았으니, 안동부와 이 지역에 선정의 사당을 세워서 영남 사람들이 존경하는 생각을 위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들이 비록 서원으로 승격해 달라고 말하나, 나의 생각에는 그 사당에다 편액을 하사하여 옛날의 경관을 바꾸지 않아야만 목석(木石)과 같이 살겠다는 선정의 평소 지조(志操)에 어긋나지 않을 것으로 여긴다.”하고, 사호(祠號)를 ‘서간(西磵)’이라고 내려 주었다. 또 하교하기를,
“서간사(西磵祠)의 편액을 하사할 때에 측근의 신하를 파견하여 치제(致祭)하게 하라. 아침에 납언(納言)의 상소에 문충(文忠)의 절의(節義)에 대한 대목에 이르러 감격된 바가 있었는데, 문정의 편액을 하사할 때와 마주쳤으니, 우연이 아니라고 하겠다. 강화의 충렬사(忠烈祠)에 날을 가려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