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동서원(鶴東書院)


1738년(영조 14) 안동부 법상동에 세워진 김상헌을 주향으로 하는 鶴東書院이 안동의 남인계 사림들에 의해 폭력적으로 훼철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노론계가 남인들의 본거지인 안동에 자신들의 근거지가 될 수 있는 서원을 세우려고 시도하다 일어난 충돌이었다. 김상헌을 주향으로 하는 서원을 건립하고자 최초로 시도된 것은 1721년이었다. 당시 안동부사로 내려온 김진옥에 의해 시도되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1932년 부사 李德孚와 법전에 거주하는 노론계 士人인 姜元一에 의해 재차 시도되었으나 남인계 士人들의 반발로 인하여 좌절되었다. 김상헌을 주향으로 하는 서원의 창건이 실제로 시행된 것은 1738년 경상도 관찰사로 유척기가, 안동부사로 魚有龍이 부임하면서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 안동 내부에서는 법전을 세거지로 하는 강원일의 진주 강씨 문중, 안동가구를 세거지로 하는 安宅駿의 순흥 안씨 문중 그리고 申思國이 중심이 된 평산 신씨 문중이 주축이 되었으나 경제적 지원 등은 감영과 안동부에서 거의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이러한 학동서원의 건립시도는 `무신란과 같은 逆亂이 안동에서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일부 노론계 사족들이 참여하였지만 建院을 주도한 것은 안동부사 어유룡과 경상도 관찰사 유척기였다. 건원론자들은 서원훼철에 가담한 인사들이 권덕수?류몽화 등 무신란 관련 혐의가 있던 인사들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서원 훼철에 가담한 인사들 중 상당수는 무신란 당시 擧義하여 의병을 조직한 인사들이었다. 그러므로 서원 훼철에 가담한 인사들은 김경헌?류정화 등 2인만 遠配되는 처벌을 받게 되고, 오히려 서원 건립을 강행한 관찰사 유척기와 안동부사 어유룡은 파직되는 등 건원론자들에게 불리하게 정리되었다. 이는 국왕인 영조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였다. 영조는 무신란(1728년)이후 영남의 동향에 주목하고 있었는 바 그렇지 않아도 불만에 차있는 영남인의 조정에 대한 불신과 감정을 촉발시켜 또하나의 무신란과 같은 반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 지방관과 훼철 주동자만 처벌하는 조치로 미봉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