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五世 |
| | | 음--구--심 규 | 子 | 학(鶴) | | 병인 등재 | 자(字) | 운거(雲擧) | 호(號) | 한재(寒齋) | | 시중(侍中) | | 사고려이시중사원위재북적이국유어하설어강공분
| | 연각보왈이장보부가여해복열원주왈이국역동이대
| | 왈폐방예락문물무괴칭소중화부당비견어유설간주
| | 노명본국주지왕가기절음종지둔삼척섭성진기배주
| | 상하증산은연구김자체부망본야(仕高麗以侍中使
| | 元位在北狄二國游魚下雪上公忿然却步曰衣章甫不
| | 可與卉服列元主曰爾國亦東夷對曰幣邦禮樂文物無
| | 愧稱小中華不當比肩於游雪間主怒命本國誅之王嘉
| | 其節陰縱之遁三陟燮姓秦其排書上下增刪隱然具金
| | 字軆不忘本也) 최문헌충(崔文憲冲) 구재집
| | (九齋集)순조 정축 후손 내진 성진 유필
| | 감로명복기성(純祖丁丑後孫乃鎭成鎭籲蹕戡路
| | 命復其姓)김학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 | 원의 황제가 의관정제한 자신을 남만ㆍ서
| | 융 등 거의 벌거벗은 오랑캐족과 동렬의
| | 좌석에 앉게하자 『우리는 소중화로서 의관
| | 문물이 중국에 버금가는데 어찌 이런 자리
| | 에서 앉힐 수 있느냐』고 항의하며 원제에
| | 게 상석에 앉혀줄것을 요구했다.격노한 원
| | 황제가 『당장 목을 베라』고 지시했으나
| | 신하들은 목을 벨 경우 고려의 사신들이
| | 오지않을 것을 우려 환국시켜 충렬왕으로
| | 하여금 죽이도록 했다.그러나 충렬왕은 김
| | 학의 기개를 높이 사 원나라에는 처형한
| | 것처럼 소문을 낸뒤 김학의 성을 바꿔 숨
| | 어살도록 했다.「김」자의 맨아랫쪽 「일」
| | 획을 위쪽의 「인」획에 더하고 「이」를
| | 덧붙여 「진」씨로 사성 강원도 삼척으로
| | 보낸 것이다.최충의 구재집에 실려있다.
| | 순조때정축(一八一七년)에 후손 내진 성진
| | 등이 순조의 행차때 길위에서 읍소하여 복
| | 성을 허락받았다.
| 묘(墓) | 황해도 토산 우봉 계해년 종중 합의로 경
| | 기도 광주시 쌍령리 금촌에 설단 二○○六
| | 년 도시 개발로 인하여 충북 음성군 음성
| | 읍 사정리에 묘단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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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六世 |
| | | 구--심--학 경 | 子 | 규(珪) | | 병인 등재 | 학력 | 예의판서(禮儀判書) | 묘(墓) | 음성군 음성읍 사정리 묘단에 위패 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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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七世 |
| | ---- 궤 | | 생(生) | | 초간 등재 | 자(字) | 원수(元水) | | 예의소승(禮儀少丞) | 묘(墓) | 부(府) 서쪽 서오리(鋤午里) 실전(失傳)
| | 되었는데 을축 어가곡산(漁稼谷山) 五
| | 三-一번지에 설단을하고 一○월 八일을 회
| | 전일(會奠日)로 정하였으나 제단(祭壇)이
| | 도시개발(都市開發)로 一九九四년 갑술
| | 九월 二一일 와룡면 가야리(佳野里) 산一
| | 四七-一번지로 이단(移壇) 묘갈을 세우고
| | 봉향(奉享) 하고 있다
| | 자좌(子坐) 합폄(合窆) |
| | 심--학--규 곤옥 | 子 | 경(鏡) | | 병인 등재 | 학력 | 종부판서(宗簿判書) | 배(配) | 익산이씨(益山李氏) | 부(父) | 승봉랑(承奉郎) 애(崖) | 묘(墓) | 음성군 음성읍 사정리 묘단에 위패 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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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八世 |
| | ----생 적 | 子 | 궤(軌) | | 초간 등재 | 묘(墓) | 호소동산(虎嘯洞山)
| | 자좌(子坐) | 배(配) | 안동권씨(安東權氏) | | 유인(孺人) | 부(父) | 위(韙) | 묘(墓) | 一九九四년갑술 가야리(佳野里) 산一四七-
| | 一번지 삼단소(三壇所) 합단(合壇) 제단
| | 을 옮기었다
| | 해좌(亥坐) | | 상석(床石)이 있다 |
| | 학--규--경 양비 | 子 | 곤옥(崑玉) | | 병인 등재 | | 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 | | 수안파(遂安派) 가첩(家牒) 에는 곤(崑)
| | 을 군(君) 이라 하였으나 군(君)으
| | 로 바꿀수 없어 뒷날의 고증을 기다린다
| 묘(墓) | 음성군 음성읍 사정리 묘단에 위패 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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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九世 |